시간, 그 기억과 망각의 흐름 속에서

이문정 (조형예술학 박사, 중앙대학교 겸임 교수)

 Librarian_TIME MITE, book from my collection, paraffin, Each 23x15x3cm, 2015

 

 꽂이에 책들이 한 가득이다. 한 권 꺼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니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파라핀(paraffin)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불탄 흔적이 남아있는 책의 파편들이다. 당황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니 나이테가 두드러지는 나무로 만든 가구가 눈에 들어온다. 발걸음을 옮겨본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번에도 그것은 불탄 책의 파편들이 만들어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브제(object)이다. 이 불분명한 오브제들에 둘러싸인 순간, 우리는 잠시 동안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분리된다.

 김원진은 책, 파라핀, 나무, 그리고 불(fire)을 이용해 시간과 기억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김원진은 기억 그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책을 주된 재료로 선택했다. 한 권의 책에는 그것을 집필한 작가의 시간과 그것을 읽는 독자의 시간이 중첩된다. 또한 책은 기억하기 위한 인간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편 시간과 기억은 필연적 관계 속에 놓인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붙잡거나 고정시킬 수 없다. 그저 계속 흘러갈 뿐이다.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억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시간은 <Re-constructed Time Shelves>(2013)에 등장하는 책들처럼 기억의 집합체와 같다. 이에 작가는 책의 두께가 기억의 두께이며 기억들이 지층처럼 쌓여서 우리의 시간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는 순간은 현재에 존재하는 자아가 과거를 만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치 책의 두께처럼 수많은 기억들이 쌓여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만들어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시간을 구성하는 기억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기억은 기계적인 저장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기억은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것이다. 따라서 기억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주관이 포함된다. 또한 기억을 되살릴 때에는 주체의 재구성과 새로운 의미 부여가 담보된다. 따라서 기억이 과거에 있었던 명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이(轉移), 변형, 왜곡, 갱신(更新)-추가, 삭제, 다시 고침-등의 작용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언제나 완벽하게 동일한 기억을 불러낼 수 없는 것이다. 김원진의 책들이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불타고 남은 조각들로 등장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작가에게 불에 타고 일부만 남은 책은 기억의 본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Swings>(2014)에 등장하는, 파라핀과 한 몸이 되어 본래의 형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책의 부분들은 흐려지고 변형되며 언제든 녹아 사라질 수 있는 기억 그 자체를 은유한다. 결국 기억은 <Time: Mite>(2013)처럼 몽롱하고 흐릿해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기억은 흐르는 시간처럼 과정 중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망각과 회상 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재구성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Twisted Moment>(2013)는 왜곡된 기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은 언제나 뒤틀려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동일한 사실도 누가 기억하는 가에 따라 바뀐다. 나는 진실이라 믿지만 그것은 흐려지고 왜곡된 것일 확률이 높다. 책으로 만든 동그란 조각들은 기억의 한 순간 혹은 한 지점을 의미한다. 그 하나하나가 모여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개인의 일생이 되고 세계의 역사가 된다. 그런데 이 해체할 수 없는 단단한 기억의 덩어리-역사-는 개인들의 비틀린 기억들이 한 몸을 이룬 군체(群體)일 뿐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표현처럼 기억은 개인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필연적인 힘이다. 기억은 현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지식이며 미래의 삶을 만들어내는 바탕이다. 그것은 현재를 위한 과거이자 미래를 위한 현재이다. 현재가 생성되는 순간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되어버리며 기억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가 된다. 미래는 곧 과거가 되며 기억은 그렇게 쌓여간다. 그리고 기억은 우리의 시간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시간은 끝없이 흐른다. 기억도 흐른다. 우리의 삶도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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