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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페이지 엮은 기억의 책 파내기

 

윤하나 기자 / CNB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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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onicles of Today –bottom (오늘의 연대기), book, plaster, 30x30x30cm, 2016

“순간의 반짝임을 있는 그대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래도 매 순간이 중첩돼서 알 수 없는 풍경을 이루는 것, 그게 인생 아닐까요?”

 

기억은 오랫동안 많은 예술가를 매료시킨 소재다.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성격을 띄는 구체적인 기억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과 달리 김원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되고 변하는 기억의 가변성에 주목한다. 기록하는 것과 기록을 파기하는 것에 익숙한 작가는 변화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속성을 발견했다. 마치 알래스카 지층의 단면을 깊숙이 파 올리는 지질학자의 마음으로 기억의 지층을 시추하는 작가, '신진 작가를 위한 CNB저널 제2회 표지작가 공모전'에 당선된 김원진을 만났다. 

 

순간을 쌓는 기억

어린 시절 쓴 일기나 친구와 나눈 편지를 부모님이 모두 모아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안 작가는 이후 책을 읽거나 기록하면, 이를 남김없이 모두 분쇄하거나 없애버리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작가가 평소 들고 다니는 두꺼운 노트에 빽빽이 적힌 일상의 기록들도 머지않아 주기적으로 처분됐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물을 자르고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흔적을 남긴 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작가는 “책이나 노트를 태우면서 그때그때 남은 재를 몇 번이고 다시 태워봤지만, 여전히 재는 남았어요.”

기억은 망각될 수 있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다고 작가는 생각했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도, 기억이 빈 자리가 인식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토록 제거하려 했던 기록들도 결국 이렇게 사라진 흔적이 남아있는 기억과 같았다. 낱장의 순간들이 쌓인 기억이란 책은 그렇게 작가의 변치 않는 주제가 됐다. 김원진은 이 주제와 간결하게 이어지는 매일 읽고 작성한 기록물과 이를 태운 재, 그리고 책을 재료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기억의 깊이, 망각의 부피

집에서 읽던 책들을 둥글게 잘라 엮은 ‘뒤틀린 순간(Twisted Moment, 2011)’은 학부 졸업 즈음 진행했던 그의 첫 작업이다. 작가에게 책은 누군가가 쓴 글이나 자신이 적은 일기를 말했다. 다시 말해,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날아갈 소중한 것을 잉크로 눌러 써내려간 흔적이다. 작가는 이렇게 두꺼운 기억의 책을 기다란 낚싯바늘로 낚아 올리듯 단층으로 들어냈다. 낚싯바늘이 가닿은 만큼, 지나쳐간 페이지 수만큼, 깊은 기억의 단면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낚아 올린 기억의 내용을 펼쳐내기보다 실에 꿰인 구슬처럼 오로지 단면만을 노출한다. “때마다 다르게 읽히며 오역되는 활자에 집중하기보다 우리가 넘긴 책의 단면을 통해 기억이란 덩어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기억이 떠난 자리에 남은 상실과 망각을 작가는 무(無)색의 하얀 석고로 떠냈다. 기억이 소환되면서 남은 동굴 같은 망각에 실존을 부여한 ‘오늘의 연대기(The Chronicles of Today, 2016)’는 한마디로 부재의 공간이다. 형체 없던 망각은 기억이 머물다 간 흔적으로서 기억의 덩어리를 증명한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책이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작가는 동네 중·고등학교 도서관이 폐기한 책이나 헌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들 역시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가 읽던 책이다. 그중 문고판을 모아 책을 각각 태우고 소실된 자리를 파라핀으로 복원했다. ‘그네(Swings, 2014)’는 불에 타 몇 단어만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이 책들을 그네로 만든 설치 작업이다. 타다 남은 단어는 흔들리는 그네가 되고 운율을 갖추면서 비로소 리듬감 있는 시가 됐다.

 

선 긋기로 순간 쌓기 

‘순간의 연대기(A Chronicle of the Moment)' 연작은 색연필로 가로로 길게 선을 그어 채운 종이를 1mm 넓이로 길게 잘라낸 후 이를 다시 붙이며 재구성한 작업이다. 작가가 그어 올린 한 줄의 선은 한 순간을 의미했다. 선을 그은 순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종이는 과거가 된다. 이 종이를 세로로 잘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이어붙인 여정은 과거를 돌이켜 기억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과거가 분절되고 각각의 높낮이와 의미를 갖추면서 기억이 작용하듯, 기억은 과거를 편집하며 전혀 새로운 흐름을 발생시킨다.

기록물을 태우고 만든 재를 이용한 작업도 다양하다. 최근 작업실 계약이 만료되면서 집에서 작업하게 된 작가는 특히 재를 활용한 페인팅을 지속하고 있다. 매일 그날의 기록물을 태워 적은 양의 재를 얻고 이를 물에 희석해 그날의 사라짐을 기록한다. 작가는 "큰 종이 위에 1 x 1cm 격자 한칸에 그날 태운 재를 칠하는데, 매번 색이 달라요. 불완전연소한 재가 더 갈색이 난다거나, 물의 농도, 그날의 종이 질에 따라서도 색은 달라져요”라며 매일 다르게 쌓인 재가 이룬 드로잉을 펼쳐 보였다. 이어 “이렇게 기록이 산화되는 과정도 기억과 비슷했어요. 제 기록을 최소화하고 정리하려는 일종의 강박관념도 결국 제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재처럼 흔적을 남기니까요.”

작가 김원진은 작가 노트를 통해 “기억의 축적과 변이 과정을 연상시키는 작업을 통해 사유의 공간을 제시한다”면서 “망각 또는 부재도 기억의 한 형식임을 보여주고, 무(無, nothingness)가 아님을 재발견하게 하고 싶다”고 작업의 목표를 밝혔다. 끊임없이 기록물을 쌓고 절단하며, 기록하고 파기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그는 마치 기억의 작동법을 실험하는 수행자처럼 보였다. 그런가하면 지나간 순간의 화석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또 순간의 연대기를 만들어가는 역사가처럼 '기억'이란 시료를 연구하는 작가의 태도는 인상적이리만치 진지했다.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9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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