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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는 것들의 연대기

A Chronology of What Happening

유진상 /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김원진_Stratal Landscape (지층적 풍경) #009_97×9

  Stratal Landscape (지층적 풍경) #009, Colored Pencil on Korean Paper, Collage, 97x97cm, 2017

 김원진의 작업은 ‘쌓기’(stacking)에 대한 것이다. ‘쌓는다’는 것은 유사한 면을 지닌 것들을 모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반복’의 형태로 다루는 것이다. 게다가 동일한 행위나 사물의 반복은 정해진 끝이 없으므로 주어진 시간 혹은 공간의 크기에 따라 작업이 계속된다. 작업은 그 크기와 무관하게 무한한 반복의 발췌된 부분이다. 그것은 끝없이 시공간을 점유하면서 반복된다는 전제 하에 하나의 부분 혹은 예시로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작은 캔버스나 조각은 동일한 반복으로 채워진 우주의 파편이다. 예컨대 ‘바벨의 도서관’은 동일한 포맷으로 이루어진 책들의 무한한 반복을 다루고 있다. 반복을 다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루하거나 기계적인 규칙이 요구된다. 하나의 규칙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것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우주가 생성된다. 하나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은 그 우주를 향해 나있는 창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의 작은 조각이 우주 전체를 가늠케 하는 것, 이것을 추상이라고 부른다.

 김원진의 드로잉은 두 번의 적층으로 이루어진다. 한번은 색연필을 이용해 가로로 그은 선들의 적층. 그리고 다른 한번은 그렇게 제작된 드로잉을 세로로 1mm씩 잘라내어 다시 붙여나가는 적층. 가로의 선들이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지각의 단면, 지층의 축적처럼 보인다면 세로의 선들은 잘려진 뒤 재배치됨으로써 지층의 절단, 이동, 붕괴, 흘러내림 등과 같은 운동성을 나타낸다. 이 섬세하고 가는 선들의 가로-세로 엮임에 대해 김원진은 ‘순간의 연대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즉 이 작업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시간’에 대한 해석, 그것의 운동을 가시화하려는 작가의 의도이다. 시간의 종적-횡적 엮임에 대해서는 헤겔에서 레비나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존재론적, 현상학적 사유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현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 그것의 운동과 의미작용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부터 오로지 ‘의사-현재성’ 혹은 ‘준현재성’을 통해서만 그것의 존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학적 입장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철학적 모색들이 있다. 가로-세로라는 구조는 시간의 유구한 종적 흐름에 대한 경험과 그것의 차별적이고 단속적이며 비-본질적인 지각이라는 횡적 흐름 사이의 관계를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김원진이 반복적으로 선을 긋거나 사물을 쌓아올리고 그것들을 직각으로 관통하는 선 혹은 단면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다. ‘순간의 연대기’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횡적 단면인 ‘순간’과 그것의 적층으로 이루어진 ‘연대기’를 동시에 지칭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면서 동시에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로잉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얼룩’이다. 김원진의 드로잉은 때로는 지층의 단면들을 반복적으로 어긋나게 하는 방법으로 일관하다가도 때로는 일정한 지점에서 수평선들의 불규칙한 흐름이 나타나면서 그것의 단층들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패턴이 붕괴하는 구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패턴의 붕괴는 특정 영역을 색채가 번지거나 혼돈에 휩싸인 얼룩처럼 보이게 한다. 시간의 얼룩, 사유의 얼룩, 세계가 우리의 인식에 틈입해서 만들어내는 불가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오류처럼 보이는 영역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간의 태피스트리에 나타나는 얼룩을 바라보는 것은 흡사 시간 속에서 재구성된 어떤 사건이나 기억의 불가해한 본질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이 어떤 계기들이 누적되어 어떤 패턴으로 직조된 것인지에 대해 형용할 수 없을 때 수많은 예측 가능한 사건들의 합리적 흐름 속에 떠오른 이 얼룩의 입자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애를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룩이 가진 미덕은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불가해한 자국은 나를 매료시킨다. 그것은 시간의 일반적 패턴을 무너뜨리고 그것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거기에 있다. 광기이자 우물거림, 지나치게 뜨겁거나 부드러운 부분,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린 부분, 열역학에서 가역성이 나타나는 순간, 거대 데이터의 오류-영역 같은 형태로.

 

 김원진의 작업에 대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탐험’이다. 예술가들은 미지(未知)를 다룬다. 예술가들이 많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답사해야 할 우주의 종류가 그만큼 많아야하기 때문이다. 단조(單調, Uni-verse) 가 아니라 복조(復調, Multi-verse)여야 하는 이유다. 수없이 많은 패턴들로 이루어진 현실들과 그것들의 무한한 연장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수의 우주들, 매번 무너지고 분기(分岐, ramify)시키는 사건과 얼룩들, 서로 겹치고 상호교환 하는 수많은 전체들, 그것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순간들의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다양성. 이런 것들의 현전에 대한 예감으로 예술가는 추상에 진입하게 된다. 화가들은 광기와 무의식, 더듬거림과 웅얼거림으로 가득 찬 지옥 같은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가들에게 위임한 사명이다. 알아볼 수 있는 현실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것. 반복과 기계의 지루한 임상을 통해 매번 ‘그곳’의 패턴들을 건져올리는 일.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아볼 수 알아볼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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