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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학을 위한 제언

전민지 /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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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한 무용 (無用한 舞踊) Dancing in the Thin Air_ Installation View (Solo Show _ Kumho Museum of Art, Seoul) _ 2023

   누락되고 표백된 시간이 리듬감 있는 반복으로써 점차 회복된다. 2017년 이래로 지속된 김원진의 <순간의 연대기> 연작은 그렇게 선형적 기억을 비선형적 형태로 풀어 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색칠된 종이를 끝없이 자르고 붙이던 작가의 신체는 무대의 뒤편에 숨겨져 있으면서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시간을 (재)생산해냈다. 그러나 방금 이곳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잘린 선들이 무수히 지나갔고, 그들은 투과된 운율에 따라 면이 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들이 흔들리는 장면 또한 연달아 목격되었다. 일정한 너비로 흩어졌던 색채의 파편은 벽으로부터 숨 고를 틈 없이 밀려오다 나란히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행할 수 있는, 혹은 행해야 하는 관객의 몸짓 (각주1) 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몇 가지 동사를 제시한다.

 

   뒤를 보기, 뒤돌아보기

   무수한 경우의 수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작은 구멍(<Holes>)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전시장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시 《무용한 무용(無用한 舞踊): Dancing in the Thin Air》에는 시간성이 지니고 있는 여러 얼굴이 공존한다. 앞과 뒤의 구분이 무화된 화면부터 벽의 앞면, 벽의 뒷면(<La Boîte Noire>, <The Fog Bow>), 회전하는 원(<The Hole>), 그리고 발레리나의 한쪽 발을 축으로 삼아 빠르게 도는 드로잉(<0시 – 나의 밤, 너의 낮>)까지. 잘게 조각나 있으면서도 공간 곳곳에서 발화하는 평면은 다시금 돌아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조우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사용된 과슈 등의 안료는 작가의 기존 주요 매체인 색연필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종이 뒷면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전작과는 달리,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스며든 흔적이 여실히 남게 된 뒷면은 앞면과 뒤섞이며 하나의 장면을 이뤄낸다. 그런가 하면 2022년 SeMA 창고 《Tu m’ 너는 나를》 전시에서 시도되기도 했던 물리적 구조체(<Eye to Eye>)는 이번 전시에 재차 등장하며 제어된 소우주를 형성한다. 움직이는 장치를 통해 시선과 시간이 엇갈릴 때, 드로잉의 앞뒤 또한 교차되며 프레임 단위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할 화면이 투사된다. 그렇기에 당신이 눈길을 잠깐 돌린 사이 포착되지 못한 피루엣(Pirouette) (각주2) 의 회전 운동은 지금도 먼지처럼 쌓이고 있다. 뒤편을 살펴보고, 자꾸만 뒤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로지르기, 앞지르기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면서도 전시장 내에 특정한 현실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수행성을 공간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다. (각주3) 전작과 마찬가지로 단순노동과 의도적 행위 사이 어딘가에 놓인 김원진의 반복은 ‘수행’이라는 단어를 경유하지 않으면 해석할 수 없는 극적인 무용이다.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 태도에 깊이 의탁하는데, 이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결코 드러날 수 없는 잔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작가가 구성한 현실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고, 우리의 눈앞을 가득히 채운 상황을 앞질러야 한다. 이곳에는 배열된 순서도, 감상의 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축적된 시간이 두터운 지층을 이룰 따름이다. 이에 이야기의 처음과 끝 역시 알 수 없으나, 1밀리미터가 6미터로 환원되는 시점에서(<Dancing in the Thin Air>) 공간 운용 감각은 새로이 발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 2차원적 풍경으로 변환되던 이전의 작업은 이번 전시와 전반적으로 맞물리며 다음 차원으로 융기한다. 일견 무용해 보이던 파편(<무용한 무용(無用한 舞踊)>)도 무르고도 처연한 흔적만을 남기는 대신, 외면할 수 없는 모서리가 되어 공간의 부피를 파고든다.

 

   시간의 지도 그리기

   지리학자 헤르하르뒤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는 일찍이 지도를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간 지도는 평면 위 약속된 기호로 공간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으나, 그의 관점에서 따르면 시간 또한 무한한 서사 구조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도의 대상 및 어휘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지도의 전통적 기능과 본래 목적으로부터 탈피해보면, 김원진이 재해석한 시간은 세계의 여러 단면을 입체적이고도 사적인 모습으로 투영한다. 이제 관람객은 ‘지금-여기’에 맴도는 현전성 (각주4) 과 그 리듬을 증험하며 작가가 고안한 지도를 완성해내기 위해 이곳을 뒤돌아보고, 가로지르는 동시에 앞지른다. 이로써 그 어떤 특정 장소나 시점에 얽히지 않은 채 숨어 있는 것과 드러나 있는 것을 모두 아우르는, 대체 불가능한 지도가 탄생한다. 결국 김원진의 전시장은 단일한 순간의 틀에 복속되는 대신, 수차례 직조된 시선이 수반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각주

1) 여기에서 ‘몸짓’은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의 논의를 따른다. “몸짓이란 몸 또는 몸과 연결된 도구의 움직임으로서, 그 움직임에 대해 만족할 만한 인과관계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빌렘 플루서, 안규철 옮김, 『몸짓들: 현상학 시론』, 워크룸 프레스, 2018. p. 8.

2) 피루엣(Pirouette)은 한쪽 발로 서서 빠르게 도는 발레 동작을 뜻한다.

3) 에리카 피셔-리히테, 김정숙 옮김, 『수행성의 미학』, 문학과지성사, 2017. p. 479.

4) “현전성은 불쑥 출현하여 리듬(시간)을 부여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 현전성은 (저 위 혹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여기’ 있다.” 이때 리듬분석가는 “시간성, 전체 속에서 각 시간들이 맺는 관계에 주목”한다. 앙리 르페브르, 정기헌 옮김, 『리듬분석』, 갈무리, 2013. pp. 9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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