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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다루는 방법

김인선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디렉터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08122019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08122019, Variable Installation, 2019 

 

 김원진 작가는 초기 작업부터 시간의 ‘층위(layer)’에 대한 시각적 구현을 실행해 왔다. 시간이라는 특정 환경 혹은 조건은 절대적인 방향과 속도를 가진다는 가설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다. 이 작가의 시간은 특히 개인의 기억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계속하여 변형되고 어긋나고 틈이 만들어지다가 메워지곤 하면서 여전히 움직이고 살아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를 시각화 하는 과정에서도 매번 새로운 시간으로서의 기록이 되곤 한다. 김원진 작가는 이러한 현상이 개인의 특수한 경험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보편화 된 감각임을 인지하고 보다 확장된 형식으로서 제시하기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표를 실현하기까지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시간을 소재로 사용해 왔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일기나 경험의 기록을 우선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이들을 소멸시키는 행위로써 그 개별성을 삭제하는 것이다.

 2019년도의 경기문화재단의 전시 프로그램인 <생생화화>에서 제시하는 평면 작업의 경우, 김원진 작가는 원본 이미지의 왜곡을 발생시켜서 완성한다. 이 작업의 제작 과정, 즉 원본을 자르고 표면에 붙이는 노동의 흔적은 작가가 온전히 소비한 절대적인 시간을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작가가 이처럼 자르고 붙이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향하는 시간은 과거이기도 지금 현재의 시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미 만들어진 원본과 작가의 행위로 인하여 만들어진 변형된 이미지와의 관계가 또 다른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과거의 기억과 시간을 재배치하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원본과 변형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혼자만의 기억을 남기는 방법과 이를 타인과 공유하지 않기 위한 지우는 행위로서의 경험은 그가 현재 행하고 있는 작업의 방법론으로서 반영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작가에게 ‘기억’과 ‘망각’을 시간의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라면, 그는 특히 이 두 개의 요소를 작업 전반에서 시간의 층위를 다루는 중요한 방법론 속에서 특히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것이 같은 속도와 같은 방향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거치고 있다는 묵은 가설은 기억을 다루는 작가의 형식 속에서 특히 무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작가의 기억 속 시간은 그리 질서정연하거나 정확하게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사건을 두고 여러 명의 서술이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 듯 그 당시 기분에 따라, 그 당시 입장에 따라, 환경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건의 세세한 흐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이를 경험한 김원진 작가가 만든 시리즈 <지층적 풍경 Stratal Landscape>시리즈는 이렇게 시간에 대한 다발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입체 작업 또한 일방향이 아닌 구불구불하게 공간을 점유하면서 결국 하나로 만나서 끝과 시작이 없는 형태로 구성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보인다.

 작가는 어릴 적 기억을 어떻게 아카이빙 할 것인가에 대한 꾸준한 몇 가지 행위를 구사해 왔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기억을 보관하는 동시에 삭제하는 행위이다. 즉 본인이 읽은 책을 태우거나 잘라내기, 자신이 쓴 글 위에 다른 이미지로 덮어버리거나 썰어버리기 등의 방법으로 삭제하거나 해체한 후 이들을 다시 특정 모양과 물질로 재조합 하는 등의 방법들인데, 책을 태운 재를 밀납에 섞어 덩어리를 만든다든지, 책의 페이지들을 둥근 모양으로 오려내서 탑처럼 쌓는 등의 행위의 결과물로서 원본은 사라지고 기억의 흔적 자체로서만 남겨지도록 했던 것이다. 작가의 기억이나 네러티브는 이런 방법을 통하여 조형적으로 박제되곤 하였다.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08122019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08122019,  Discarded Books and Records, Steel, Variable Installation, 2019

 글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한 평면 작업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김원진 작가가 과거를 환기하는 첫번째 방법은 종이에 몇 가지 색을 칠하거나, 특정 텍스트를 적어서 채워 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그가 기록하고자 했던 일상의 경험들이거나 개인적 취향이 드러나는 색, 형태 등이 존재하였다. 그 다음에는 완성된 화면이 세로 방향으로 가늘게 잘린다. 잘려진 조각들은 조금씩 그 위치를 이동하면서 재배치되면서 동시에 화면 위에서 다시 부착된다. 이미지는 원본 이미지를 알아볼 수 없는 혹은 그 흔적만을 감지할 수 있는 무늬로 변형되면서 다른 감각으로의 인식 변이를 불러 일으킨다. 이는 종이를 자르고 다시 붙이는 과정 속에서 물리적으로 생기는 이미지 간의 균열과 연결로부터의 의도적 오류를 통해 전환된 또 다른 층위로부터 발생한 현상이다. 이러한 방법은 작가의 평면 작업 현식으로서 고착되어 다양한 색면과 패턴을 구사하는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작가는 입체 형태의 작업을 제작하기 위하여 책을 도려내고 이들을 쌓아 이어나가면서 탑 모양 혹은 띠 모양을 만들곤 하였다. 이 단계에서 공간을 점유하는 물리적인 구축물은 그 자체로 시간의 축적을 형상화 한다. 이는 어느 전시에서는 허물어져버리는 일시적 현상으로서 드러나기도 했으며 또 어느 전시에서는 박제된 형태의 조형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이든 이를 형성하는 한장 한장의 재료들에는 시간성이 부여된다. 그것이 개인의 것이었든 누구나 열람 가능한 인쇄물이었든 김원진 작가의 손과 시간을 거치면서 그 원래의 내용을 삭제한 또 다른 시간성과 내용을 이식할 수 있는 또 다른 단계의 거대한 구축물이 되었다. 

  작가의 평면과 입체 그리고 설치로 구현되는 이 작업들의 이러한 방법론은 현재 작가가 취하는 조형적 언어가 되었다. 이전에 유효했던 작가 개인의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기억과 시간의 개념을 타인의 시간까지 확장하면서 보다 일반화 된 언어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스스로의 개별적 컨텐츠를 넘어서 불특정 다수의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9년도에 선보이는 전시에서 선보이는 입체 형식의 작업은 무작위로 모은 잡지들로부터 만들어졌다. 작가가 수집한 다양한 정보를 담은 수많은 종류의 잡지 페이지들의 특정 의미를 담은 이미지와 텍스트적 정보들은 둥근 원형태로 잘려졌다. 이들은 조형 요소로서의 수많은 파편들의 집합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쌓아서 공간을 휘감는 조형물을 구성하면서 소비되었던 절대적인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특정 형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원본의 이야기가 사라진 채 그 흔적을 쌓아서 형성한 시간의 층위는 작품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존재했던 것에 대한 죽음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지층’을 남긴다. 존재했다는 흔적만이 남겨진 이 덩어리 혹은 이미지의 표면은 다시 그 자체로 여러가지 가능성을 품는다. 이미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찾기 보다는 보는 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양방향의 반응이 작동하기 위하여 작가의 작업을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게 하는 흔적들, 텍스트가 숨겨지거나 변형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의 자율성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조금씩 발생한 오류에 의해 창작되는 이야기들이 이 작업들을 맴돌게 된다.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11082019

The Land of the Glitches (오류지대) 11082019, Colored Pencil, Pencil, Pen on Paper, Collage, 220x130 cm, 2019 _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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